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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31일 수요일

현대 판타지) 멸망한 세계의 사냥꾼


멸망한 세계의 사냥꾼. (멸세사)
어디 볼만한 소설 없나 하며 평소와 같이 이 작품 저 작품 깨작깨작 둘러보다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추천을 받고 읽어보았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고 몇 화 읽어나 볼까 하고 카카오페이지에서 찾아서 읽기 시작했는데,
간만에 정말 간만에 수작을 넘은 대작을 발견한 거 같습니다.

한편 한편 지날 때마다 마치 진흙 속의 진주를 찾은 듯,
뒤 덮인 먼지 속 빛을 발하는 보석을 찾은 듯,
좋은 작가의 좋은 글을 찾았다는 만족감과 이 소설을 읽을 때 마음 꽉 차게 느껴지는 포만감에
저도 모르게 결제를 해서 요 며칠 동안 기어코 완결을 봤습니다.

소설의 내용은 어떠한 이유로 현대 세상이 망하였고 남은 문명의 찌끄레기의 끝자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사냥꾼이자 해결사로 아등바등 살아가는 한 남성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망해버린 세계 속에서 괴물로부터 생존을 위협당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인간, 그리고 괴물들과의 힘겨운 생존경쟁보다 손쉬운 먹잇감인 생존인류를 사냥하는 것을 선택한 잔인한 식인강도들, 또 그런 그들을 사냥하는 노련한 사냥꾼의 모습은 마치 폴아웃이나 위쳐와 같은 게임을 생각나게 합니다.
실제로 소설의 초반부를 읽을 때엔 마치 클래식 폴아웃(1, 2편)을 플레이 하는 것 같았고, 또 매드맥스(2015년작 분노의 도로 말고 그 전작들)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느낀 건 작가님의 세심한 필력이 처음부터 끝까지 큰 변동폭 없이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요즘 많은 양산형 판타지 소설(양판소)들을 읽을때마다, '소설의 깊이가 참 옅다' 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 게, 마치 큰 톱니바퀴가 돌긴 도는데 서로 맞물려있지 못해 헛도는 느낌이라면
작가님의 세심한 설정, 그것을 적절히 표현하는 필력은 마치 큰 톱니바퀴 둘 사이에 작은 톱니바퀴가 정확히 맞물린, 오차 없이 정교한 시계구조를 보는듯한 느낌을 줍니다.

예를 들자면
양판소 에서는 힘을 얻음 = 주먹을 뻗음 = 반동에 팔이 부러짐. 정도라면
멸세사 에서는 괴물에게 정신지배 능력을 씀 = 괴물과 교감 됨 = 괴물의 스스럼없는 희생, 죽는 그 순간에조차 맹목적인 따름을 느낌 = 그 모순된 모습과 느낌에 소름이 돋음 = 술자의 정신이 오염됨.
이라는 세세한 설정이 소설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이어집니다.

또, 이 소설에 푹 빠질 수 밖에 없었던 큰 이유 한가지는 소설의 케릭터들 하나하나가 정말 입체감이 뚜렸하다는 겁니다.
방아쇠도 없는 권총으로 사냥꾼을 등쳐먹으려고 하다 추가금 협상을 당한 바보도,
되바라진 꼬맹이를 좋아하지만 식인강도들에게 넘길 수 밖에 없었던 할아범도
별 스토리 없는, 짧은 지나가는 엑스트라인 주제에 소설이 끝나는 순간까지 기억에 남는 매력을 뽐냅니다.

케릭터들의 입체감이 너무나도 뚜렸하고 설정이 세세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글이 케릭터들에게 휘둘러져 중구난방이 되거나 설정놀음에 글이 지루하게 늘어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전개를 이끌어가는 작가의 필력은 독자를 세계관에 더욱 빠지게 만듭니다.


소설을 읽다 보면 크게 크게 소설의 분위기가 변하는 구간이 있는데, 이 부분은 취향을 좀 타지 싶습니다.
예를 들어 괴물에게서의 생존을 더 좋아하시는 분들이 계실 테고
또는 워킹데드 마냥 그런 망가진 세계에서 괴물보다 더 괴물 같은 인간들과의 사투를 더 좋아하시는 분들도 계실 테고,
그런 망가진 세계의 그림자에서 세상을 움직이려는 흑막과의 싸움이 더 보고 싶은 독자들도 있을 테고
아니면 그런 진흙탕 속에서 죽을 둥 살 둥 구르며 떡밥을 회수하는 주인공을 보고 싶어하시는 분들도 있을 텐데
이 소설은 한가지만을 보여주는 게 아닌 말 그대로 작가가 생각하는 세계-괴물, 인간, 흑막과 떡밥 모두 포함된 세계를 보여주고 그 속에서의 주인공을 그려내는 그림입니다.

하지만 모든걸 다 떠나서, 작가의 필력이 거의 깡패 수준입니다. 세계관이 전혀 매력적이지 않더라도 멱살잡고 캐리할 정도의 필력인데, 세계관이 이토록 매력적인 작품 안에선 정말 미쳐 날뛰는 필력에 정신 못 차리고 글에 빠져들게 만듭니다.


물론 무조건적으로 장점만 있는 소설은 아닙니다.
굳이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설정 충돌도 조금 있고, 또 끝까지 묘사되지 않고 묻힌 캐릭터들 이라든지, 약간 루즈 해지는 극 후반과 개인적으로 조금은 다르게 끝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결말 (먹먹함과 감동의 여운은 길게 남지만) 등등은 독자에게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냥꾼의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서 여운이 더 길게 남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중에 다시 한번 천천히 읽어봐야겠습니다.


추천도 中 下
강력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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